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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5 10:35

닥치고 정치

밑줄긋기 2011/10/25 10:35


김어준의 명랑시민 정치교본,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첫판 4쇄 펴낸날 2011년 10월 12일, 푸른숲, 값 13,500원

그렇게 생각해보면 결국 우는 공포에 지배당하는 자들이 보여주는 본능적 대응이야. 두려우니까, 무서우니까, 자신만이라도 살아남겠다며 발버둥 치는 것들의 리액션. 그래서 난 우는 세계관이 아니라 반응이라고 생각해. 공포와 마주한 동물의 반응. 그런 수준의 반응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도 다들 하는 거거든.



좌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있다 다시 하겠지만, 좌의 경제는 그럼 뭐냐. 아직 만들지도 않았는데, 생산하기도 전에 나눌 걸 계획하는 것부터 이미 경제라고 하지. 어떻게 나눌 건지 미리 정해놓고 그다음에 생산하자는 거거든. 어떻게 나눌지 정해놓지 않고 아무리 생산해봐야 결국 힘센 놈이 다 가져간다. 그런 소리지. 좌와 우는 그렇게 기본적으로 경제를 보는 출발점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고. 그런 기질적 좌가 정교한 이론으로 정리된 건 겨우 근대서야. 하지만 우는 정교해질 것도 없어. 우는 이념이 아니라 공포에 대한 반응이니까.
그런 우를 유일하게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가 바로 자존심이라고. 그게 없으면 그냥 동물이야. 그리고 기절적 우가 그런 가존심을 가져야 비로소 하나의 정치 세력, 우파라고 불러줄 수 있다고 봐. 그런데 우리나라 우파는 그게 없어. 우파가 자존심이 없으면 우파라고 하면 안 돼. 겁먹은 동물이라고 해야지. 자존심이 없으니까 미국에 빌붙는 걸 그저 이익의 문제로 치환해버리잖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전시작전권 반환이나 한미동맹 이야기하면 우리 우파는 항상 돈 이야기를 한다고. 미국에 분담시키는 게 국방비가 더 저렴하다고. 그게 무슨 우파야. 장사꾼이지. 우리나라 우파는, 기질적 우, 그 동물적 반응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거야.
스스로를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우파라고 하려면 그따위 논리를 내세우면 안 되지. 아니 군사작전권을 남에게 넘겨준다는 건, 전장에 나가 죽으라고 말하는 권리를 남에게 넘겨준다는 건데. 자기 자식더러 죽으러 가라고 명령할 권리를 남에게 넘겨주면서, 그게 더 싸게 먹히니까 넘긴다는 논리를 내세운다는 게 말이 되냐고. 그게 어떻게 우파냐고. 자기 재산을 지켜주기만 하면 그게 누구든 상관없다는 거잖아. 어쨌든 나만 살고 나만 배불를 수 있다면 좀 비굴해도 된다는 거잖아. 공포에 대한 동물적 반응이 결국 거기까지 가버린 거지.



우가 세계를 약육강식의 정글로 내가 먼저 포식자가 되어 살아남아야겠다는, 공포에 대한 동물적 반으이라면, 좌는 정글 그 자체가 문제라고 접근하는 이들이야. 개개인이 문제가 아니라 자원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어차피 제한된 자원이니 이걸 두고 경쟁만 해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좌도 정글의 불확실성이 두려운 건 마찬가지지만, 우가 그 공포에 압도되어 자기만이라도 살려고 반응하는 거라면, 좌는 그 공포를 잘게 나눠 각자가 담당해야 하는 공포의 몫을 줄여서 해결하려 하는 거라고. 문제는 밀림 그 자체에 있는 거니까. 우가 본능적 반응이라면, 좌는 논리적 대처야.
그래서 각자가 처리해야 하는 공포의 크기를 균등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이 대목에서 평등이 아주 중요한 가치로 등장하게 되는 거지. 평등이 깨지면 기본적인 결속 자체가 안 되는 거니까. 이 체계는 나도 남도 같은 정도로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는 전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니까. 그게 무너지면 갑자기 나만 뒤처질지 모른다는, 나만 손해 볼지 모른다는 공포가 힘들게 정해둔 규칙을 무너뜨리게 되니까. 내가 가져가는 게 덜하지 않고, 저놈이 가져가는 게 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지. 우리 사회야말고 바로 이 공포가 너무도 극심한 사회지. 나만 뒤처질지 모른다, 나만 손해볼지 모른다. 그래서 다들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열심히 두리번거리지. 낙오하지 않으려고. 동물적 우편향 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이지.
그래서 우가, 쎈 놈은 더 가져가도 된다는, 질서와 위계를 당연시하는 수직적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면, 좌는 누구나 같은 조건에선 같은 정도의 권리르 가져야 한다고 믿는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지. 그러니 연대가 키워드가 되는 거고, 그 연대를 작동시키는 엔진은 염치가 되는 거지. 인간이 가진 염치. 우의 엔진이 욕망과 공포인데 반해서. 그렇게 우는 동물의 반응이고, 좌는 이성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그렇게 좌가 논리적 추론을 하려면 먼저 우처럼 정서적 공포가 압도되지 않아야 하거든. 그건 그렇게 하려고 되는 게 아니라, 그냥 그게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는 거라고 봐. 그러니까 난 좌 역시 타고나는 거라고 보는 거지. 좌는 공포를 이성으로 제어하면서 논리적 추론을 통해 시스템을 문제 삼는 거니까, 기질을 넘어 하나의 세계관이라고 봐줄 수가 있지. 하지만 그런 세계관은 근대에 들어서 서양의 기획에 의해 이념으로 정리된 거지. 좌, 우가 그제야 탄생한 건 아니라는 거야.


연애와 결혼은 단편적인 예일 뿐이고 우리가 겪는 무수한 일상과 삶의 갈등에서 부딪혀 되돌아오는 자기 바닥을 확인하는 과정, 그건 자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인지 받아들이고 하나의 독립적 인격체가 되어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절차지. 그리고 그런 과정을 겪고 나서야 자신만의 균형 감각을 획득하는 거다. 내가 대통령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한, 삶의 균형 감각, 이런 말하면 사람이 꼭 겪어야만 알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반론할 수 있어. 아니다, 겪어도 모를 순 있다. 하지만 겪지 않은 건 아는 게 아니라 아는 척이다.


구조와 프레임을 통찰하지 못하고 구체적 삶과 인간이 없는 균형감각이란 그렇게 허망한 거야. 이건 그나마 숫자로 제시하니까 그의 군형이란 게 얼마나 웃긴 줄 아는 거야. 숫자로 표시되지 않는, 구체적 삶을 충분히 겪지 않아 생기는 한계는 자명해. 그래서 구체적 삶이란 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어떤 구체적인 삶을 살아왔는가가 결국 그의 정치가 될 수밖에 없다고. 박근혜는 그런 과정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정치를 이해하려면 결국 인간을 이해해야 하고 인간을 이해하려면 단일 학문으로는 안 된다. 인간은 글허게 간단하지 않다. 팩트와 가치와 논리와 감성과 무의식과 맥락과 그가 속한 상황과 그 상황을 지배하는 프레임과 그로 인한 이해득실과 그 이해득실에 따른 공포와 욕망, 그 모두를 동시에 같은 크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섭해야 한다. 나는 통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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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과 편애로 만드는 특별한 세상

김중혁 산문, 1판 1쇄 2011년 10월 5일 발행 , 마음산책, 값 13800원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프로필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걸 좋아했다. 거기엔 도약이 있고, 지속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도저히 연결될 것 같지 않은 두 개의 사실이 하나로 이어져 있기도 하고, 의외의 반전이 계속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경력을 디자인하는 것이고 프로필에 적힐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모두 자신의 페이지를 디자인하고 있다.


시간은 늘 우리를 쪽팔리게 한다. 우리는 자라지만, 기록은 남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기록은 정지하기 때문이다 자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쪽팔림도 없을 것이다. 반대로, 쪽팔림이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인생이 예순부터라면, 청춘은 마흔부터다. 마흔 살까지는 인생 간 좀 보는 거고, 좀 놀면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을지 오리엔테이션에나 참가하는 거다. 그러니까 마흔 이전에는 절대 절망하면 안 되고, 내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체념해서도 안 되는 거다. 마흔이 되어보니 이제 뭘 좀 알겠고 이제 뭘 좀 해볼 만하다 싶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 같다.

나는 시간을 잘 모르겠다. 시간의 속도를 가늠하기 힘들다. 느린가 하면 너무 빠르고, 너무 빠른가 싶으면 한없이 늑장을 부리는 게 시간이다. ...... 시간은 충분하다 우리의 목표가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저 성실하게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조금만 더 행복해지면 된다. 주름을 만들 듯 천천히 내 속도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가끔 그런 질문을 받는다. 소설을 쓰면서 당신은 어떻게 바뀌었냐고. (속으로) 깜짝 놀란다. 바뀐 걸 어떻게 알았지? 맞다. 바뀌었다. 나는 소설 덕분에 바뀌었다. 달라졌고 (내가 보기에)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됐다.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됐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 더 열심히 듣게 됐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한 편의 소설을 끝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한다. 주인공을 죽일지 살릴지, 왼쪽 길로 보낼지 오른쪽 길로 보낼지, 사랑에 빠지게 할지 배신하게 할지,,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라고 쓸지 ‘그러나’라고 쓸지 ‘그런데’라고 쓸지 선택해야 한다. 무수히 많은 선택 사항을 썼다가 지운다. 나는 그 무수한 선택들을 거쳐왔다. 나는 그게 내 삶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의 선택과 현실 속의 선택은 분명 다르지만 선택하기 위해 결정하는 방식은 언제나 똑같다. 하나를 취하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 버린 것은 돌아보지 말아야 하고 취한 것은 아껴 써야 한다.
조금 고쳐서 말해야겠다.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는 소설 쓰기를 권하고 싶지 않다. 소설은 투입하는 시간만큼 결과물이 나오는 작업이 아니다. 모든 게 더디고, 아주 조금씩 전진하고, 가끔은 (이런 제기랄!) 뒤로 가기도 한다. 문장들을 이어 붙여 문단을 만들고, 문단을 쌓아서 흐름을 만들고, 흐름을 엮어서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도와주는 사람도 없다. 혼자 모든 걸 조사하고, 혼자 책임지고, 혼자 기뻐해야 한다. 하지만 낭비해도 좋은 사람에게는, 다른 걸 버리고 시간을 얻은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신나는 작업이 없을 것이다. 한 문장 다음에 올 수 있는 문장은 무한대다. 무한대의 가능성 중에서 오직 나만이 선택할 수 있다. 오직 한 사람만이 모든 걸 조절할 수 있다. 그 쾌감은 소설의 첫 문장을 쓰기 시작해서 마짐가 마침표를 찍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한번 빠지면 그 중독에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내가 알기론 불가능하다.


우선, 이것부터 해결하자. 지금 여러분의 책상을 방 한구석에 붙여놓고, 글을 쓰려고 그 자리에 앉을 때마다 책상을 방 한복판에 놓지 않은 이유를 상기하도록 하자. 인생은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스티븐 킹의 글귀 중에서

블라인드를 모두 내리고 낮잠을 자다 깼을 때, 어두운 작업실에서 방향 감각을 잃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혼자서 천장을 올려보면서 생각한다. 나는 뭘까. 곰곰이 생각해도 내가 뭔지 잘 알 수 없으므로 오랫동안 멍하니 천장을 본다. 나는 1이긴 한데, 뭐에서 뭘 빼고 남은 1인지, 아니면 무수히 많은 1을 곱해서 생겨난 1인지, 늘 1이었던 것인지, 어느 순간 1이 된 건지, 도대체 나는 뭔지, 그렇게 오랫동안 1을 생각한다.


나는 왜 사진을 찍으려는 걸까. 왜 누군가에게는 한 달 월급인 돈을 카메라 사는 데 쓰는 것일까. 나는 왜 기록하려 하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고 싶은 것일까. 아름다움을 기록하려는 것일까, 정보를 기록하려는 것일까, 내 흔적을 기록하려는 것일까. 왜 정확한 색상을 표현하기 위해 화이트밸런스를 맞추고, 왜 대상을 왜곡하지 않기 위해 광각을 피하며, 어째서 심도를 배우기 위해 연습을 하고, 도대체 뭘 찍겠다고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일까. 나는 그 답을 찾고 싶었다.


그가 데생을 가르치는 이유는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다른 이름으로 정의하자면, 아마도 상상력일 것이다. 세상에는 답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질문들이 존재하며, 답을 알 수 없으므로 하나의 질문에 무수히 많은 답이 있을 수밖에 없다. 존재하지 않는 답을 찾기 위해 세상을 아주 자세히 관찰하면 어느 순간 자신만의 답이 생겨나게 된다.


내가 문학을 선택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아름다움의 정체를 상상하고 싶었고, 그 상상의 줄기를 글로 표현하고 싶었다. 반 고흐의 작품을 보고 난 후 생각해보니 문학 역시 ‘종이라는 평면’에 펼쳐지는 예술이 아니었다. 반 고흐가 캔버스에 두껍게 붓질을 했던 것처럼, 나는 내가 원하는 장면의 시간을 마음대로 늘릴 수 있다. 1년을 한 문장으로 줄일 수 있으며 한 시간 동안의 일을 책 한 권으로 쓸 수도 있다. 같은 단어를 계속 반복할 수도 있으며, 어떤 단어는 전혀 쓰지 않을 수도 있다. 좋은 소설을 읽을 때면 머릿속에 거대한 지도가 그려지고, 완벽한 건축물이 세워질 때가 있다. 가보지 못한 곳이고 만져보지 못한 건축물이지만 머릿속에 생생한 입체로 남을 때가 있다. 내 소설도 그렇게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고 단락을 교체한다. 나는 계속 두껍게 붓질을 한다. 그 방식은 소설이라는 장르가 생겨난 이래 단 한 순간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21세기라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다.
이제 왜 내가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지 알 것 같다. 나는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관찰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저장된 사진을 통해, 내가 세상을 관찰하는 방식의 패턴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존 러스킨은 관찰의 도구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린 문제이다. 내 모든 감각을 열어 세상을 관찰한 다음, 맨 마지막 순간에 사진으로 그것을 기록한다면 나의 감각은 더욱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카메라에게 그 주도권을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나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잇을 것이다. 더 많은 아름다움을 내 속에 저장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위대한 사건은 스티커처럼 작은 공간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선수들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 그들의 표정에서 그동안 겪은 시간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환호를 보며 울고 있으면 그들의 시간을 함께 이해한 듯한 느낌이 든다. 눈물이란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된 대가로 내가 세상에 지불하는 동전인 셈이다. 억울해서, 나를 몰라줘서, 속상해서 흘리는, 온전히 나를 위해 흘리는 눈물을 싫지만, 다른 사람을 위한 눈물이라면 그게 얼마든 삶의 통과비로 지불하고 싶다.


나이가 들면 뭐든지 되겠지, 나이가 들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테니 내가 하고 싶은 걸 뭐라도 할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했다. 고등학교 때는 어렴풋하게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꿈 같은 건 아니었고, 글을 쓰는 걸 직업으로 삼으면 어떨까 궁금했다. 문예 창작을 가르쳐주는 학과가 있다는 건 나중에 알았기 때문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고, 국어국문학과가 글쓰기를 가르쳐주는 학과가 절대 아니라는 건 일찍 깨달았기 때문에 학교는 대충 다녔고,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나중에 알았기 때문에 나에게는 아무런 재능도 없는 줄 알았다. 아무것도 되지 못할 까 봐 자주 두려웠다.


본격적으로 소설 습작을 시작한 게 그즈음이었다. 소설을 쓰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할까 봐 자주 두려웠다. 다른 사람들이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나는 빈둥거렸다. 빈둥거리는 게 괴로웠다. 밤새 소설을 쓰고 정오에 일어났을 땐 나 자신이 패배자 같았다. 눈에 보이는 걸 하고 싶었다. 벽돌을 쌓아올리든 물건을 옮기든 뭔가 눈앞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글을 쓴다는 건 참으로 추상적인 일이다. 추상적인 일을 하다보니 스트레스 역시 추상적이었다.


나 역시 누군가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뭐라도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김동현 선수의 심정을 알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재능’이란 (천재가 아닌 다음에야) 누군가의 짐짝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나에 대한 배려 없이 무작정 흐르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운 다음에 생겨나는 것 같다. 그래, 버티다 보면 재능도 생기고, 뭐라도 되겠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는 걸 본 적은 없고)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결국 남는 건 이름이다. 슬픈 이름으로 남을 수도 있고, 즐거운 이름으로 남을 수도 있다. 어떻게 사느냐가 결국 그걸 결정할 것이다. 나는 농담 같은 이름으로 남고 싶다. 아무리 슬픈 일이 많아도, 좀, 웃고 싶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다른 무엇을 포기하고 있었다. 시간을 포기하고, 돈을 포기하고, 또 다른 어떤 것을 포기한 다음,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결국 인생은 어떤 것을 포기하는가의 문제다. 선택은 겉으로 드러나지만 포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돈을 많이 벌기로 선택하고, 결국 돈을 많이 벌게 된 사람이 어떤 걸 포기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든 소리는 아름답다. 문제는 소리에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제 그 소리를 내는가, 언제 그 소리를 듣는다, 어떤 마음을 듣는가, 어떤 크기로 듣는가, 그게 문제였다. 결국 인간이 문제였다.


승패는 언제나 엇갈린다. 모든 스포츠 선수들은 이기기 위해서 싸우지만 결국 이기느냐 지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기나긴 승부 속에서 승리와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하다. 승리의 기쁨에 심하게 도취하지 않고 패배의 수렁에 너무 깊이 빠져들지 않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순간, 진정한 승부 근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렸을 때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서로를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를 이해하지 않은 채 그냥 지냈고, 그렇게 시간이 쌓였고, 서로를 이해하는 대신 함께 보낸 시간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 만난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래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좋아,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거야, 생각의 귀를 닫으면 아무리 세상이 시끄러워도 상관없는 거야, 라고 굳게 마음먹었지만 마음 같지 않았다.


나는 가끔 예전의 심심한 라디오가 그립다.


밴드의 목표가 뭐예요? 그는 우물쭈물하다가 목표가 없다고 했다. 그냥 음악을 할 뿐이라고 했다. 대답을 듣고 내 질문을 후회했다. 어째서 목표 따위를 물었을까. 예술에 목표 같은 건 없다. 집중을 요구하는 권이나 군에는 뚜렷한 목표가 있겠지만, 마음이나 예술에는 목표가 없다. 마음을 기록하는 예술은, 그러므로 산만한 자들의 몫이다.


한때는 유머가 이 잔인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을 웃게 한다면, 뭔가 바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현실과 이상이 점점 어긋나는데 유머가 무슨 소용일까 싶기도 하다. 유머가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도피처로만 쓰인다면 무슨 소용일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다.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도 개인을 바꿀 수는 있을 테니까, 개인이 바뀐다면 언젠가는 세상이 바뀔 수도 있을 테니까, 포기할 수는 없다.


커트 보네거트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그때 나는 수업에는 잘 들어가지 않고 학교 도서관이나 교정의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이따위 우주라면 없는 편이 낫겠다’라든가 ‘죽고 나면 영혼은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와 같은 치기 어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세상이란 공포였고, 죽음이란 블랙홀이며, 삶이란 지루함이었고, 내일이란 불필요한 희망이었다. 세상 다 산 것 같은 표정의 나를, 사람들은 한심하게 생각했다. 나는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며 세계문학전집을 들추어보다가 보네거트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무엇보다 이름에 들어 있는 ‘V'라는 문자가 나를 압도했다. 그때 읽었던 작품이 『태초의 밤』이었다.
보네거트를 읽으면서, 나는 유머를 배웠다. 유머 없는 인간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배웠다.
......(너무 웃겨서 터지는) 눈물을 훔쳐가며 커트 보네거트를 읽었다. 웃으면서 입술을 앙다물었다. 세상에 무릎 꿇지 않고, 세상을 비웃어주어야만 내가 다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에게서 배웠다.



아무리 용을 써봐도, 우리는 결국 한입 가득 썩는 도자기를 넣고 다니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우주는 광활하고, 세상은 넓고, 인간은 작다. 인간은 너무 작아서, 커트 보네거트의 눈에는 인간들이 보이지 않는다. 인간들이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결국 인간들의 이야기인 소설이어서 커트 보네거트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디를 언제나 'vonnegut'로 정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나는 언제나 보네거트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을 기억하고 싶다. 소설가가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내 소설이 보네거트의 소설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소설은 ‘웃겼으면’ 좋겠고,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좋겠고, ‘그러나 결국 인간의 이야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개인의 역사란 결정적 순간이 아닌 ‘덜 결정적 순간’으로 이뤄진 것이 아닐까? 내가 지금 여기서 살고 있구나 느끼는 것은, 내가 지금 삶의 어떤 터널을 빠져나가고 있구나 느끼는 것은, 결정적 순간이 닥쳤을 때가 아니라 덜 결정적 순간을 어는 순간 깨달았을 때다. .....
누군가 내 얼굴을 매일 똑같은 시간에 찍어주진 않을 테니 그렇게라도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면, 나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면 그것도 참 멋진 일일 것 같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일상적인 겁은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정말이지, 사는 게 무섭다. 시간이 무섭고 사람이 무섭다. 지금보다 나이가 더 들면 그런 겁이 사라진다고들 하는데 그거야 겪어봐야 아는 것이고 일단은 무서울 뿐이다. 사는 게 무섭고 사람이 무서운데 귀신 따위가 무서울 리 없다.


피아노를 치는 것도, 파도를 타는 것도, 다른 어떤 일들도 모두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가 하려고 하는 모든 일들은 재능이 있고 없고가 중요하지 않다. 누구에게 도움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도 중요하지 않다. 이들이 파도를 타면서 느꼈을 감정, 사치가 피아노를 치면서 느꼈을 감정, 누군가 그림을 그리면서 느꼈을 감정, 누군가 소설을 쓰면서 느꼈을 감정,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걸 즐기면서 느꼈을 감정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파도을 타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일이다. 세상을 구하는 일도 아니고 아프리카에서 굶고 있는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길도 아니고, 종교적인 분쟁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이 될 수도 없다. 전적으로 개인의 감정을 위한 일이고, 스스로의 기쁨을 위한 일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기쁨을 제대로 찾아낼 수 없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해도 세상을 구할 수 없다.


어떤 글이든, 써본 사람은 안다. 지우고 붙이고 고치고 채우면서 한 줄의 글을 완성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한 줄의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말들을 머릿속으로 중얼거려야 하는지, 써본 사람은 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말이 필요한데 그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다.


누군가 죽고, 누군가 다치고, 누군가 아프고, 누군가 일이 터지고, 누군가 도망가는 삶이 계속되고 있다.


내가 스톡홀름의 작은 호텔방에서 외로워했던 것처럼 지금 이 시간 서울의 어딘가 작은 쪽방에서도 반드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사연이야 어떻든 모두들 외로워하며 버티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서울은, 도시는, 야생보다 더욱 무서운 곳일지도 모른다. 자,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남읍시다.



*역시 난 중혁빠. 중혁 소설과 산문을 너무 좋아한다. 나랑 맞나봐...
비슷한 공감대와 성향을 가진 건 아닌데, 그의 글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인가 보다. 열심히 써서 나도 뭐라도 되겠지에 공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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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0 17:23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김종산, 시집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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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5 03:01

김중혁 장편소설, 초판 발행 2011년 7월 13일, 문학동네, 값 12,000원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가능한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져서 도저히 게임을 할 수가 없어. 게임이란 말야. 어떤 일을 누가 더 잘하는가를 겨루는 게 아니라 제한된 환경 속에서 누가 오랫동안 살아남는가를 겨루는 거라고 할 수 있어."

고우인은,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삶은, 확률이 적은 사건들이 연속해서 일어난 기적의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스무 살이 넘을 때까지 살아남은 것은, 둥근 공에다 아주 작은 점을 찍은 다음 그 공을 굴렸을 때 점이 맨 위로 보이도록 서는 확률보다 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노는 처음부터 자신의 선택이란 별로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주사위를 던지고, 자신은 던져진 주사위의 숫자만큼 이동하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주사위를 던져주는 거라면, 모노는 온전히 주사위에 자신을 의지하고 싶었다.

문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파란색 문이 열렸을 때 모노는 그 삶이 누군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법이니까. 레드는 처음에 모노를 알아보지 못했다. 모노가 레드를 향해 한 발짝 더 다가서자 그제야 얼굴을 알아보았다. 레드가 환하게 웃자 모노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에이, 이제 겨우 육십 아니에요?"
"네가 육십을 우습게 아는구나. 너 환갑이 뭔지 알지?"
"알죠."
"한 바퀴 다 돌았다는 뜻이야. 이제부터는 갔던 길을 또 가는 거라고. <헬로, 모노레일>로 치면 특급으로 유럽을 한 바퀴 돌았는데, 파업카드 때문에 완행으로 갈아타고 또 도는 거지."
"그래서 재미없다고요?"
"지루하지."
"아저씬 나이를 잘 모르겠어요. 스무 살 같기도 하고 여든 살 같기도 해요."
"나도 내 나이가 스무살로 딱 굳어졌으면 좋겠다."

상상이 모든 고통의 시작이었다.

"할머니, 비행기에는 창문을 왜 이렇게 작게 달아놓았을까요? 답답하게."
"크면 얼마나 무섭겠니."
"왜 무서워요? 창이 크면 별도 보고 달도 보고 좋을 텐데."
"보이는 게 많을수록 더 무섭지."
"알면 알수록 더 무서운 건가요?"
"몰라도 무섭고."
"알아야 해요, 몰라야 해요?"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으니까 더 무서운 거지."
"바다나 우주 같은 거요?"
"응, 대충 그런 거."

모노는 레드에게서 몬탈치노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마음속에 쌓여 있던 담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저 이탈리아의 어느 마을 이름에 불과했지만 몬타리노라는 단어는 모노에게 어떤 가능성이었다. 누군가 몬탈치노라는 마을에 살고 있다는 확신, 지구 반대편에도 누군가 자신과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존재의 가능성, 외계인이 존재 가능성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듯 몬탈치노라는 마을과 그 마을의 사람들은 존재 가능성만으로 모노의 마음속에 실재했다. 그러헥 좋아하던 몬탈치노라는 단어를, 모노는 한참 동안 잊고 있었다.

루카는 말없이 운전만 했따. 해야 할 말들을 차곡차곡 쌓아둔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쉽게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게 얼굴에 드러났다. 모노는 기다렸다.

"와, 영광이네. 반이나 믿게 한 거면 다 믿게 한 거지. 나도 잘 모르겠어."

--
역시 난 김중혁의 팬.
내겐 그의 소설적 매력이 좋다.
모노, 고우창, 고우인, 레드, 루카
블랙, 핑크, 화이트, 블루, 레드

맨처음에는 게임얘기로 시작되더니 뒤로 갈수록
스펙터클 sf소설이 되더니
그 다음에는 뭘까? 물론 게임을 메인으로 하는 소설이다.
근데 이상하거나 어색하거나 나쁘지 않다.
그 속의 인물에 빠져들기도하고
그 속의 인물에 공감하기도 하고
그 속의 인물에 동의하게 된다.

고갑수가 캡슐을 타고 날아갈 때는 좀 슬펐다.
오래전 딸인 고우인에게 줬던 상처를 그제야 미안하다고 얘기한다.
아마 미안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가슴에 한을 안고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게임도 잘 알아야 하고
유럽의 도시나 철도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할 것 같고
그의 여행의 경험이 잘 녹아들어든 소설이 아닌가 한다.
게임 속 캐릭터들의 게임이 아니라 현실 속의 어디선가는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갑수가 사라지는 거 말고는 다른 슬픔이 없어서 좋았다.
항상 소설은 누군가는 죽어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잘 쓴 소설.
강력추천.
난 중혁에게 중독되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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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5 03:01

김남일 장편소설, 1판 7쇄 발행일 2011년 4월 15일, 문학동네, 값 10,000원


생은 엄중한 것이다.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의미에서는 더욱.

살아남은 지금, 살아남아서 햇빛을 다시 보게 된 지금, 나는 살아남았다는, 살아남아서 햇빛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미칠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 때까지 정치 아닌 게 어디 있어요? 우리 일상조차 매 순간 정치적 선택이라구요.

그게 바로 속절없다는 것.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어떻게도 되지 않았고, 어떻게도 할 수 없었다는 ㅓㄳ. 그리고 그런 사실을 새삼 깨닫는 것.

아, 모든 인간들의 시시콜콜한 미시사를 어찌 다 털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알고보면, 알고보면, 누군들 슬프지 않고, 누군들 달을 보고 꺼이꺼이 울고 별을 보고 소리없이 눈물짓고 싶지 않겠는가. 그 미시사야말로 그들 각각에게는 세계대전이나 혁명보다 더 엄중한 거시사인 것을!

독일의 어느 시인이 썼지. 영원한 것은 침묵하며 지나가는 것은 소란스럽다고. 이제 침묵으로 말할 수밖에 없네. 두루 안타깝지만, 이제 내 종족의 운명이라 생각해. 벗이여, 그래도 나는 믿고 싶네. 시는 침묵 속에서 한결 아름답게 빛날 거라고.

---
현실을 대단한 위트와 풍자한 소설.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 쓰지 못할 소설.
근데 아직 그런 유머에 익숙하지 않거나 아니면 나의 지식이 너무 미천하여 이해를 못하는 것 같다.
꼼꼼히 잘 읽어야만 하는 행간을 이해해야 이해할 수 있는 뛰어난 소설.
강력추천!
다시 한번 찬찬히 도전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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