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그림 쑥, 빅피시 펴냄, 초판 1쇄 발행 2024년 9월 4일
고요하게 노를 저으니
이따금 물이 들어왔고 나지막한 성취와 칭찬을 수확했다.
짜릿함은
강렬하고 찰나여서
나는 또 노를 저어야만 했고 그것이 예전만큼 괴롭지만은 않았다.
언젠가는 빛을 발한다고, 반드시 발한다고
나는 믿으므로. (p.8-9)
내 글이 별로면 어떡하지, 하며 펜을 놓던 날.
내 그림을 우스워하면 어떡하지, 하며 수백 번 지우고 기우다 찢긴 종이들.
거의 매일 쓰고 그린다.
완벽주의의 극복을 위해.
매일 좋은 글과 그림을 내어놓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단지 두려워 않고 시작하는 것이다.
어색한 단어와 뭉개진 그림.
그런 것을 발견하면 부끄럽다가도 인정하고야 마는 것이다.
이런 글도 있고 이런 그림도 있다.
나와 나의 부산물은 아주 당연하게도 완벽할 수 없다.
첫 문장이 맘에 안 들면 고치면 그만이다.
팔 한쪽이 어색하면 지우고 그리면 된다.
시작하지 않으면
영영 발견되지 못하는 작품만이 있을 뿐이다.
어쨌든 오늘도 쓰고 그렸다.
그러면 된 거다.(p.18-19)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후회하고 싶지 않으므로.
떠오르는 불안들을 겹겹이 대비하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요령은 없었다.
따지자면 미련했고.
그래도 후회할 수 없이 최선이었다.
나의 노력 중
쓸모없던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부끄러움이 경험치로, 미련이 요령으로
익는다고 믿어.
이제는 나를 믿고.(p.22-23)
가장 견디기 힘든 수식은
쓸모없는 인간.
나의 쓰임새를 인정받으면 그 자체가 너무 흡족한
자발적 노예 인간.
자기 효능감.
무능한 나를 견디는 건
인정 욕구와 자기 효능감 사이, 나는 그게 참 중요한 인간 같다.
정말이지 고통스럽다.
열정과 탈진 사이.(p.36-37)
얼른 결정을 내리고 싶다는 마음에 이 애매함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에,
머릿속이 황망할 때는 무표정 아래 이리저리로 날뛰는 감정이 숨어 있다.
후회해 봤자 늦은 일들이 있지.
울어봤자 바뀌지 않는 것들.
그런 건 차라리 얼른 잊어버리는 게 낫겠다.
머물러봤자 바뀌는 건 없으니까.
어쨌든 나는 나아갈 것이다.
아쉬운 선택이 있을지라도 갑자기 폭삭 망하진 않는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버티고 나아가다 보면 분명 나아가고자 하던 곳으로,
환한 곳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만 자책하고 이만 아쉬워하고
일어나.
할 수 있는 걸 차근차근하자.(p.64-65)
대화를 마치고 나는 물었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뻤다.
기쁘면 왜 눈물이 날까.
자문하면서도 어쨌든 홀가분해지는 것 같아 더 기뻤다.
오랫동안
아무 일이 없는 날은 시시하다고 생각했어.
삶이 너무 납작하다고.
납작한 내가 싫었다.
밋밋하게 끝나는 하루가 밀도 끝도 없이 불안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그 평온에
불안을 느끼지 않는 것을 어려워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평온은 귀하고
평온을 온전하게 평온이라고 느낄 때 비로소 충만해진다는 것을.(p.72-73)
밥은 꼭 챙겨 먹어.
알겠지?
이 말에
울컥 솟는 무언가를 꾹 누른다.
슬픈 일과 슬픈 일 사이에도 밥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거북한 날이 있었다.
눈물 맛이 나는 밥을 꾸역꾸역 씹어 삼키는 것이 고단한 시간.
그럼에도 꾸역거리며 먹었던 이유는 멈출 수 없는 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양 덩어리를 꼭꼭 씹어 목구멍에 밀어 넣는다.
밥은 먹어야지.
그래야 힘을 내지.
밥은 꼭 챙겨 먹어.
알겠지?(p.132-133)
사람이 단단해 보이면
슬플 때가 있지, 되려
얼마나 많은 진통을 겪고 저렇게 일찍이 잘 참게 되었나,
내색하지 않게 되었나 하고 이따금 애처로웠다.
처음부터 단단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
부딪히면 아프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울어도 해결되지 않았으니, 도리어 수습이 더뎌졌으니 앞으로 나아갔겠지.
대충 눈물을 닦고.
그렇게 되기까지
무너져도 봤겠지.
억억 울어도 봤겠고.
그러나 끝내
인내하고 견고해야지만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아챘겠지.(p.178-179)
그저 있어줘.
당신의 자리에서
그저 바라봐 줘.
나를 믿고 바라봐 줘.
나는 내 길을 갈래.
우리 각자 행복하자.
그러고 나서
당신의 행복을 우선 챙기면서.
나도 내 자리에서 행복할 테니.
뒤에서 밀거나 앞에서 끌지 않고 그저 바라봐 줘.
나와 같은 방향을 보고, 그저.
만나서도 행복하자.
그러자.
우리
각자의 삶을 잘 들여다보고,
서로의 마음도 잘 들여다보자.
적절한 거리에서.
(p.198-199)
단박에 바뀌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노력과 결과의 괴리를 빤히 바라보는 일은 때로 무척 괴로워서
다시 발걸음을 멎게 만드는 것이었죠.
나를 파괴할 권리는 나에게 있지만,
나를 온전히 부양할 의무도 없다고 할 수 없었죠.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많은 것을 포기하고
역시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고 있어요.
그래요.
어쨌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주 가까운 거리만을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의 일, 오늘의 식사, 이번 달의 일정, 다음 달의 여행 계획, 그런 가깝고 명확한 것들이요.
그렇게 나를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p.270-271)